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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 : 대한문 - 중화문 - 중화전 - 석조전 - 준명당 - 즉조당 - 석어당 - 덕홍전 - 함녕전 - 정관헌
살아있는 공간, 경운궁에 가다
경운궁(*덕수궁의 옛 명칭)에 한번쯤 가보았다면 '궁궐이 작고 아담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보고 난 후라면 더욱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운궁은 작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처럼은. 옛 기록에 따르면, '궁궐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기와의 파도와 같았다'는 표현이 있었을 만큼 건물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궁궐은 한 국가의 정치권력과 문화발전의 상징인 동시에 임금과 왕가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수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거나 근무했던 곳이기 때문에 건물이 많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많은 건물들이 없어졌고, 궁역도 작아졌다. 궁궐은 정지된 공간이 아니고, 계속해서 변모하고 있는 살아있는 공간인 만큼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공간은 세월의 한 켜에 불과하다. 하여 삼간을 염두에 두고 보시길 권유한다. 여기서 삼간은 바로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이다.
많은 이들이 궁궐의 모습을 보며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러나 '현재' 공간만을 보며,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생활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모른다면 그 공간이 주는 의미를 충분히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이 마치 그 시대의 궁궐을 보듯이, 좀 더 풍부한 시각에서 바라보실 수 있도록 궁궐에서 훼손되고 사라진 부분, 그리고 담긴 의미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임금과 신하가 걷던 길, 삼도(三道)
궁궐 정문은 모두 삼문(三門)으로 임금과 신하가 드나들던 문이 유별(有別)했다. 가운데는 어문(御門)이라 하여 임금님만 다닐 수 있는 문이었고, 양쪽으로 문무대신이 다녔다. 문이 세 개니 길도 세 개 ! 삼도(三道)는 말그대로 세 개의 길을 의미한다. 임금은 남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기준으로 - 동쪽에는 책을 잡은 사대부였던 '문반'들이 섰고 동쪽에 있어 '동반'이라고도 했다. 서쪽에는 칼을 잡은 사대부였던 '무반'들이 섰고 서쪽에 있어 '무반'이라고도 했다. 이 두 집단을 합쳐 우리는 '양반'이라 불렀고, 이 양반계급이 조선시대를 이끌어온 핵심인력이었다.
삼도를 '길'이라고 칭하기에는 대한문(경운궁의 정문) 시작한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난다. 궁궐이 제 역할을 했을 때 삼도는 경운궁의 중심 건물이었던 중화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름 그대로 3개의 '길' 역할을 충실히 했으나 일제시대에 차가 궁궐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훼손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시간을 거슬러 삼도가 있다고 상상하면서, 한 번 임금의 길로 걸어보시길 권유드린다 : )
궁궐에서 너무나도 흔한, 잔디
궁궐에 가보면 잔디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전에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던 시절, 잔디에서 김밥을 먹는 풍경은 흔했다. 그러나 그 당시 궁에 살았던 임금님은 잔디를 보지 못했다. 왜일까?
자, 잔디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지 부터 생각해보자. 바로 묘지다. 묘지는 음기(陰氣:어둡고 침침하고 쌀쌀한 기운)이 많이 느껴지는 곳인데, 반대로 궁궐은 양기(陽氣: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활발한 기운)이 가득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궐 안에는 잔디를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오늘날의 궁궐에서는 흔하게 잔디를 볼 수 있을까? 지금 여러분들이 볼 수 있는 잔디는 건물의 터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얘기한대로 궁궐의 많은 전각들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잔디가 채웠다. 지금은 조경과 어우러져 잔디를 보존하고, 많은 이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잔디는 그 당시 궁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변모된 모습 중 한 부분인 것이다.
잔디가 있는 곳에 전각이 있었다고 상상하면서 궁을 둘러 보신다면, 좀 더 빼곡하고 활기찬 궁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중화전을 가기 위한 통로, 중화문
현재 중화문은 보시다시피 '문'의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중화문은 중화전의 보호막도 되어주지 못할 뿐 아니라, 중화문이 아니고서도 중화전으로 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 훼손되었다는 증거이다. 예전에는 행랑(회랑)이라고 하여 벽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담벼락이 아니라, 비가 오거나 햇볕이 강할 때 잠시 머물거나 이동할 수 있는 복도식 담벼락이었다.
지금은 사진 오른쪽에 전각처럼 보이는 저 부분만 행랑의 일부로 남아있다. 사각 테두리 안에 한 건물만 있었고, 그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우리가 모든 전각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이 관람 포인트다.
중화전을 높이 우러러보게 만들었던, 월대
삼도를 따라 중화문을 통과하여 중화전 앞까지 가면 누구나 고개를 살짝 들어 전각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전각을 높은 위치에 있게 하는 '월대'(전각 앞에 있는 섬돌) 때문이다. 월대는 건물을 위엄있고 웅장하게 보이는 역할을 했고, 우러러보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월대는 위쪽에 있는 상월대(上月臺)와 아래쪽에 있는 하월대(下月臺)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특히 상월대는 임금이 계신 곳과 가까운 만큼 직급이 높은 당상관들만 올라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 벼슬은 18품계로 정3품 이상을 당상관이라 하였다. (당상관에서도 상/하가 있었는데, 정3품의 상(上) 계급만 당상관에 속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장관급의 역할을 했던 벼슬 품계다.
당상관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실 것 같아 좀 더 설명하자면, 우리가 쓰는 표현 중에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미 확보해 놓은 벼슬, 어떤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표현으로 쓰인다.
우리가 입장권 천 원을 주고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이 공간이,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로 돌아가보면 당상관이 아니고서야 아무나 쉽게 올라오지 못했던 그런 공간이었다는 것을 상상해보면 좀 더 진귀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우리나라 궁궐 중 경운궁은 특히 아픔이 많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조선 임금을 통틀어 경운궁과 관련이 깊은 왕은 선조, 광해군, 인조, 고종, 순종 임금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연관이 있는 임금을 꼽자면 바로 선조임금과 고종임금이다. 두 임금의 공통점은 나라의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는 점이다. 선조 때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고종 때는 일제강점기를 지나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운궁에서는 두 임금의 힘든 정치적 상황과 그것을 이겨내고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했던 노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 공간을 엄숙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둘러볼 필요는 없지만, 담겨 있는 의미를 생각하며 본다면 더욱 풍부한 시각으로 그곳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궁궐은 한 국가의 정치적 심장부 역할을 했던 중요한 곳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한 시대의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노애락이 있었던, 스토리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궁궐 전각과 공간에 대해 좀 더 글을 쓸 예정이다. 여러분들이 보는 궁궐이 곳곳의 공간이 지나간 세월 속에 유물로 남아있는 곳이 아니라, 때로는 선조의 지혜를, 때로는 그 시대의 아픔을, 때로는 우리만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다가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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