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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여행

경운궁 : 공간의 재해석

by RosyLife 2020.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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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宫에 가기 전에

서울의 중심에 있는 덕수궁, 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나들이나 산책 겸 많은 분들이 찾으시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 오늘 포스팅에서는 ​​덕수궁을​​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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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 : 대한문 - 중화문 - 중화전 - 석조전 - 준명당 - 즉조당 - 석어당 - 덕홍전 - 함녕전 - 정관헌

 

살아있는 공간, 경운궁에 가다

경운궁(*덕수궁의 옛 명칭)에 한번쯤 가보았다면 '궁궐이 작고 아담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보고 난 후라면 더욱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운궁은 작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처럼은. 옛 기록에 따르면, '궁궐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기와의 파도와 같았다'는 표현이 있었을 만큼 건물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궁궐은 한 국가의 정치권력과 문화발전의 상징인 동시에 임금과 왕가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수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거나 근무했던 곳이기 때문에 건물이 많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많은 건물들이 없어졌고, 궁역도 작아졌다. 궁궐은 정지된 공간이 아니고, 계속해서 변모하고 있는 살아있는 공간인 만큼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공간은 세월의 한 켜에 불과하다. 하여 삼간을 염두에 두고 보시길 권유한다. 여기서 삼간은 바로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이다.

많은 이들이 궁궐의 모습을 보며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러나 '현재' 공간만을 보며,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생활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모른다면 그 공간이 주는 의미를 충분히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이 마치 그 시대의 궁궐을 보듯이, 좀 더 풍부한 시각에서 바라보실 수 있도록 궁궐에서 훼손되고 사라진 부분, 그리고 담긴 의미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임금과 신하가 걷던 길, 삼도(三道)

궁궐 정문은 모두 삼문(三門)으로 임금과 신하가 드나들던 문이 유별(有別)했다. 가운데는 어문(御門)이라 하여 임금님만 다닐 수 있는 문이었고, 양쪽으로 문무대신이 다녔다. 문이 세 개니 길도 세 개 ! 삼도(三道)는 말그대로 세 개의 길을 의미한다. 임금은 남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기준으로 -  동쪽에는 책을 잡은 사대부였던 '문반'들이 섰고 동쪽에 있어 '동반'이라고도 했다. 서쪽에는 칼을 잡은 사대부였던 '무반'들이 섰고 서쪽에 있어 '무반'이라고도 했다. 이 두 집단을 합쳐 우리는 '양반'이라 불렀고, 이 양반계급이 조선시대를 이끌어온 핵심인력이었다.

경운궁 대한문 앞, 삼도

삼도를 '길'이라고 칭하기에는 대한문(경운궁의 정문) 시작한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난다. 궁궐이 제 역할을 했을 때 삼도는 경운궁의 중심 건물이었던 중화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름 그대로 3개의 '길' 역할을 충실히 했으나 일제시대에 차가 궁궐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훼손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시간을 거슬러 삼도가 있다고 상상하면서, 한 번 임금의 길로 걸어보시길 권유드린다 : )

 

궁궐에서 너무나도 흔한, 잔디

궁궐에 가보면 잔디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전에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되었던 시절, 잔디에서 김밥을 먹는 풍경은 흔했다. 그러나 그 당시 궁에 살았던 임금님은 잔디를 보지 못했다. 왜일까? 

자, 잔디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지 부터 생각해보자. 바로 묘지다. 묘지는 음기(陰氣:어둡고 침침하고 쌀쌀한 기운)이 많이 느껴지는 곳인데, 반대로 궁궐은 양기(陽氣: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활발한 기운)이 가득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궐 안에는 잔디를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오늘날의 궁궐에서는 흔하게 잔디를 볼 수 있을까? 지금 여러분들이 볼 수 있는 잔디는 건물의 터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얘기한대로 궁궐의 많은 전각들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잔디가 채웠다. 지금은 조경과 어우러져 잔디를 보존하고, 많은 이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잔디는 그 당시 궁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변모된 모습 중 한 부분인 것이다.

잔디가 있는 곳에 전각이 있었다고 상상하면서 궁을 둘러 보신다면, 좀 더 빼곡하고 활기찬 궁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경운궁의 잔디

 

중화전을 가기 위한 통로, 중화문

중화전의 정문, 중화문

현재 중화문은 보시다시피 '문'의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중화문은 중화전의 보호막도 되어주지 못할 뿐 아니라, 중화문이 아니고서도 중화전으로 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 훼손되었다는 증거이다. 예전에는 행랑(회랑)이라고 하여 벽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담벼락이 아니라, 비가 오거나 햇볕이 강할 때 잠시 머물거나 이동할 수 있는 복도식 담벼락이었다.

중화문(왼) 행랑의 일부(오)

지금은 사진 오른쪽에 전각처럼 보이는 저 부분만 행랑의 일부로 남아있다. 사각 테두리 안에 한 건물만 있었고, 그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우리가 모든 전각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이 관람 포인트다.

 

중화전을 높이 우러러보게 만들었던, 월대

삼도를 따라 중화문을 통과하여 중화전 앞까지 가면 누구나 고개를 살짝 들어 전각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전각을 높은 위치에 있게 하는 '월대'(전각 앞에 있는 섬돌) 때문이다. 월대는 건물을 위엄있고 웅장하게 보이는 역할을 했고, 우러러보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궁궐의 월대
월대 위의 중화전

월대는 위쪽에 있는 상월대(上月臺)와 아래쪽에 있는 하월대(下月臺)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특히 상월대는 임금이 계신 곳과 가까운 만큼 직급이 높은 당상관들만 올라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 벼슬은 18품계로 정3품 이상을 당상관이라 하였다. (당상관에서도 상/하가 있었는데, 정3품의 상(上) 계급만 당상관에 속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장관급의 역할을 했던 벼슬 품계다.

당상관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실 것 같아 좀 더 설명하자면, 우리가 쓰는 표현 중에 '떼어 놓은 당상'이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미 확보해 놓은 벼슬, 어떤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표현으로 쓰인다.

우리가 입장권 천 원을 주고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이 공간이,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로 돌아가보면 당상관이 아니고서야 아무나 쉽게 올라오지 못했던 그런 공간이었다는 것을 상상해보면 좀 더 진귀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우리나라 궁궐 중 경운궁은 특히 아픔이 많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조선 임금을 통틀어 경운궁과 관련이 깊은 왕은 선조, 광해군, 인조, 고종, 순종 임금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연관이 있는 임금을 꼽자면 바로 선조임금과 고종임금이다. 두 임금의 공통점은 나라의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는 점이다. 선조 때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고종 때는 일제강점기를 지나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운궁에서는 두 임금의 힘든 정치적 상황과 그것을 이겨내고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했던 노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 공간을 엄숙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둘러볼 필요는 없지만, 담겨 있는 의미를 생각하며 본다면 더욱 풍부한 시각으로 그곳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궁궐은 한 국가의 정치적 심장부 역할을 했던 중요한 곳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한 시대의 사람들이 생활하며 희노애락이 있었던, 스토리가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궁궐 전각과 공간에 대해 좀 더 글을 쓸 예정이다. 여러분들이 보는 궁궐이 곳곳의 공간이 지나간 세월 속에 유물로 남아있는 곳이 아니라, 때로는 선조의 지혜를, 때로는 그 시대의 아픔을, 때로는 우리만의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다가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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